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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조윤기의 Names of Beauty

윤기 씨, 아릅답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아름다움에 대해 숙고하는 시간을 갖는 건 처음이었는데요. 일단 아름다움에 접근하기 위해서 제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들을 쭉 떠올려봤어요. 제가 시를 쓰는 사람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 몇 편이 떠올랐고 그 다음엔 소설, 영화나 음악들도 꼽을 수 있게 되더라고요.

아름다운 시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고를 수 있었던 건 황병승 시인의 <메리제인 요코하마>였어요. 다음으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떠올랐고요. 이런 식으로 제가 아름다움을 느꼈던 작품들을 엮어나가다 보니까 어떤 맥락이 보이더라고요. 그건 뭐랄까, 결핍이나 불완전함 같은 거였어요.

예를 들면 청춘소설 속의 방황이나 정서적인 불안 속에서 오는 어떤 결여가 아름다움으로 다가온 거예요. 스스로 거기에 동의할 수 있었던 건, 이미 완전하고 모든 게 충족된 상태는 재미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거든요. 그렇게 의외로 빠르게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반례 하나가 떠오르더라고요.

무엇이었나요?

이건 어떤 작품이나 대상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제가 실제로 체험한 시간에서 느낀 건데요. 작년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필리핀으로 워크캠프를 다녀왔거든요. 2주 정도 타클로반 이라는 도시에 머물렀어요.

사실 외적인 조건만 보면 결핍이 많은 곳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식수도 충분치 않고 생활에 있어서 여러모로 불편한 점도 많았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곳에서 한국인 대원들과 현지인 분들과 함께 공유했던 시간을 돌아보면 결국 충만함이나 완전함이라는 단어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거예요.

감정적으로 더 이상 무언가가 필요치 않다는 기분이었거든요. 저는 그 시간을 굉장히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고, 때문에 불완전함이나 결핍이 과연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어요. 결국 전 완전함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낀 셈이었으니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차이가 있더라고요. 어떤 대상을 두고 타자他者로서 아름다움을 느낄 땐 결핍이나 불완전함이 요인이었지만, 제가 직접 포함된 시간 속에서는 완전함을 이유로 아름다움을 느낀 거죠. 사람이란 역시 제 일과 타인의 경우를 구분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단 여기까지만 결론을 내두고 전시 준비 때문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샤워를 하다 어떤 단어 하나가 떠오른 거죠. 아름다움에 대해 앞서 말씀해주신 분들의 글을 읽으니까 대개 한 두개의 단어로 정의를 내리시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제가 찾은 키워드는 탈출이었어요. 이건 지금까지 말씀드린 아름다움에 대한 단상들을 종합하는 단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불완전함이 아름다운 이유는 완전함이라는 기준에서의 탈출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서 시 <메리제인 요코하마>에서는 불완전함을 나쁘거나 덜 좋은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아요. 오히려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체험하게 하는 시라고 할 수 있죠. 하루키의 소설도 그러했고요.

필리핀에서의 경험을 완전한 체험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씀드렸는데, 사실 그 시간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완전함이라는 기준에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은 아니에요. 어쩌면 그건 제가 그간 살아온, 도달하기 위해 발버둥 쳤던 완전함이라는 구속에서 탈출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완전-불완전을 나누는 기준 역시 선천적이나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이 사회 속에서 전승되고 학습되어지는 것이잖아요. 결국 다른 사람이 설정해놓은 기준에 부합해서 ‘완전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는 셈인데, 이런 건 구속이나 다름없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어요. 그게 기준을 벗어나서 탈출을 감행할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이유예요.

탈출이 곧 아름다움이라. 재미있네요. 틀에 박힌 기준을 벗어나려는 것이 탈출이라면 탈출이라는 단어로 아름다움을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 역시 하나의 탈출로서 아름다운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동시에 윤기 씨는 완전함과 불완전함을 가르는 이 사회의 기준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하루키의 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계속 헤매잖아요. 그건 그가 무언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봐요. 결여됐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작가가 그 인물을 묘사할 때는 그 상황을 비극적이나 부정적인 시선에서 보지 않고, 그래도 수용하는 태도를 취한다고 느꼈어요.

<메리제인 요코하마>도 그렇고요. 언젠가 이 시에 관한 비평문을 써본 적이 있는데, 일단 제목부터가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메리제인’이라는 이름과 ‘요코하마’라는 지명부터 일견 어울리지 않잖아요. 외래어이기 때문에 정보도 제한적이고. 시를 읽어봐도 메리제인과 요코하마에 대해 설명을 해주지는 않거든요. 이런 정보의 부재나 낯선 장소로의 끌어당김도 불완전한 세계의 상징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반면에 필리핀에서의 2주를 돌아보면, 적어도 심리적으로는 무언가가 더 필요하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어요. 다 되어있다는 느낌이요. 그런데 이걸 완전함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하나 싶기는 해요. 다시 불완전-완전의 프레임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라서요. 아름다움에 대해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런 틀로부터의 탈출이기도 하거든요.

은평구에는 토마토학교라는 게 있어요. 매주 토요일마다 대학생 교사가 발달장애 아동들을 만나서 놀이 활동을 하는 건데요. 거기 참여할 때도 역시 그런 충만함을 느껴요. 필리핀에서의 시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저는 그걸 어떤 기준에서도 벗어난 순수함이라고 느껴서 ‘순수함’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어찌됐든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건 굳어진 기준이나 구속에 때 묻지 않은 자유 상태의 것이라고 믿어요.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 탈출이 필요한 거고요.

특히나 일상이나 삶의 전반적인 형태가 규격화되어 있고 정형화된 한국에서, 우리가 점점 아름다움에 무감해지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야기를 조금 보태자면, 저는 시를 쓰기 때문에 뭘 생각하든 일단 시를 가장 먼저 떠올리곤 해요. 개인적으로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여행이 의무라고 생각하거든요. 농담처럼 여건이 안 되면 안방에서 화장실로라도 여행을 가야 한다고 이야기할 정도로요.

보통 여행을 가서 느낀 감상이나 아름다움으로 시를 쓰게 되어있는데, 여행의 핵심은 장소나 거리가 아니라 관습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생각을 해요. 여행에 있어서는 태도나 과정이 중요하다고 믿는 거죠.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세 같은 것들이요. 좀 뻔한 말이 되는 것 같은데 (웃음) 여행이 아름다운 건 그래서라고 믿어요.

사실 탈출을 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탈출지는 다시 정착지가 되기 마련이잖아요. 다시 탈출을 시도해야할 대상이 되는 거죠. 저는 시를 쓰면서 매번 탈출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를 계속 갱신해나가는 거예요. 뭔가 깨뜨리고 싶은 마음이죠. 그런 면에서 탈출이란 끊임없는 자기 갱신이고, 아름다움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 가닿을 수 있는 무엇이 아닐까 생각해요.

시를 쓰다보면 보편적이고 낯익은 미사여구를 고르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런 것들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공인된, 이른바 보편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게 보통인데 일단 쓰고 나면 멋이 없어요. 결국 쓰기 싫은 말을 써야 할 때가 생기는 거예요. 익숙하고 편한 것들을 깨나가는 거죠. 제게 시를 쓰는 작업은 그런 의미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게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제 나름의 방법인 셈이에요.

그럼 지금의 윤기 씨에게 있어 탈출의 대상은 무엇인가요? 지금 당장 탈출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나요? 공간이라든지, 혹은 시간이라든지요.

말씀드렸다시피 탈출이란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태도라고 생각해서, 막상 대상을 지칭하기는 좀 어렵긴 하네요. 탈출이란 결국 A에서 B, B에서 C로의 단계적 이동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가짐이라고 믿거든요. 태도의 문제인 거죠.

탈출에는 실패가 없어요. 문이 잠겨있다고 해서 탈출이 실패하는 게 아니라 방안에서도 얼마든지 탈출을 해볼 수 있는 거죠. 하루에도 한 번씩 갱신은 가능한 거니까요. 방에서 화장실로라도 여행을 가야한다는 말씀을 드린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말이 너무 관념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어서 좀 균형을 잡아보자면요. 개인적으로 현실에서의 탈출을 위해서는 역시 금전난으로부터의 탈출을 꼽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해요. 전시하면서 돈을 너무 많이 써서. (웃음)

시를 쓰면서도 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기 힘들다고 느끼는 때가 있어요. 방안에서도 얼마든지 내면의 탈출을 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그게 누구나 가능한 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이미 닥친 현실적인 어려움이 탈출을 제한하고 가로막는 큰 걸림돌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결국 지향의 문제이지 않을까요?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도 이 끈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도 그렇게 믿고는 있지만, 사실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당장 극심한 현실적, 사회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탈출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은 의문도 드는 거죠. 그 분들의 격리가 단지 그들의 의지부족이나 무능함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너무 낭만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 말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를 원하지도 않고요. 물론 아름다움을 위해서 탈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탈출의 기회가 공평하게 제공되지는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누군가에겐 탈출의 태도니 하는 말들이 결국 허황된 말장난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헬조선만들기> 전시회 전경 / 2017

기획하신 전시도 그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건가요? 탈출의 기회가 굉장히 제한적으로 제공되는 ‘헬조선’에 관한 작품들을 내놓으셨는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다만 저는 이 체제 안에서 단순히 ‘탈조선’을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마주보고 바꿔나가자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탈조선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테니까요. 이 시스템을 똑바로 보고 개선해보자는 거예요. 그게 탈출의 또 다른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탈출로써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사회란 결국 탈출의 기회가 공평하게, 최대 다수에게 제공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겠죠. 저는 그게 예술의 기능이라고 생각해요. 예술이 만인에게 허락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도 그래서고요.

저는 사실 시각예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거든요. 그래서 준비하면서 어려움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을 시도한 것은 이게 바로 예술의 본령이라는 믿음 덕분이었어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해보는 것.

그렇게 탈출을 경험해보는 게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과정이지 않을까 싶어요. 전시에 있어서는 바로 그 태도가 중요한 점이었어요. 작업 내내 다른 분들과 워크숍을 많이 한 것도 그래서고요. 다 같이 한번 예술을 해보는 것, 그 갱신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지옥의 소나타 / 2017

감사합니다. 대화 마치기 전에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이 대화는 기록으로 남을 텐데요. 휘발되는 게 아니라 어딘가 남는 말이 되는 셈인데, 지금 당장 마지막 남기는 말을 해야 한다면 어떤 말씀을 남기고 싶으신지 궁금해요.

마지막이라, 마지막 말이 된다면 이걸 남기고 싶어요. 지금까지 제가 했던 말들은 모두 가식이 아니었다고요.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 <한기연 토마토학교>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에서.​

#시 #메리제인요코하마 #탈출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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