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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이며 전무이고 싶은 이사무엘의 Names of Beauty


사무엘 씨는 아름다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처음 질문을 받고 대답을 고르면서 떠오른 것은 아름다움이란 결국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어떤 대상이라는 생각이었어요. 그 말인즉슨, 아름다움은 사람에 따라 얼마든 다양하고 광범위해질 수 있다는 거죠. 그게 윤리가 아니더라도요. 이를테면 누군가는 남을 해하는 행위를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있을 테니까요.

모두가 동의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그건 모두에게 다른 것이어서 굳이 어느 한 대상을 국한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다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예요. 일반적인 관점에서는요.

그럼 사무엘 씨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차원에서 제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 이른바 제게 있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균형’이에요. 이것은 제 이상향과 관련한 주제이기도 하고 어쩌면 제가 존재하는 이유 역시 어떤 균형을 찾아가는 데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스스로를 가만 보면 가끔 제 안에 서로 너무 다른 양단의 모습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해요. 간단히 예를 들자면 저는 활발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조용하고 숫기 없는 사람이기도 하거든요. 만약 제 한쪽 면만을 본 사람들이 각기 모여 제 이야기를 한다면 아마 그들이 묘사하는 저는 굉장히 모순적인 사람일 거에요.

제 안에 그런 상반된 모습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 드리면, 저는 매번 그 정도를 조절하면서 제가 속한 곳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예를 들어 제가 속한 어느 공동체가 너무 이성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러면 저는 일부러 감성적인 사람처럼 행동하고요, 그 반대로 감성적인 집단에서 보다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도 해요. 그게 제가 균형을 찾는 방식이거든요. 그런 노력은 제 안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고요.

사실 극단 사이에 절대적인 중간은 없을지도 몰라요. 반드시 중립을 지키는 것만이 균형을 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제게는 단지 결핍된 부분을 채우고 너무 도드라진 부분을 절제하려는 성향이 있는 거예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도 비슷한 느낌인데요. 저는 그게 바로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나름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어요.

같은 맥락에서 지금 커피를 내리고 있는 이 밸런싱 사이폰도 제게는 아름답죠. 끓은 물이 관을 통해서 원두가 있는 글라스포트로 옮겨가고, 거기서 제 몸을 우려낸 뒤 다시 탱크로 이동하면서 한 잔의 커피를 만들어내는 도구거든요. 말하자면 저는 이 물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양단을 오가며 적절한 균형을 찾아가는 사람이요.

사무엘 씨에게는 종교도 큰 관심사라고 알고 있는데요. 거기에서도 이런 균형 감각이 필요할까요?

종교도 물론 제게 아주 중요한 주제예요. 이름에서도 벌써 신앙적인 냄새가 나잖아요 (웃음). 그러나 종교 생활과 일상 생활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일도 늘 신경 쓰는 부분이죠. 예를 들면 교회에서 가끔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인데, 보통 ‘신앙이 좋다’라는 말씀들을 하시거든요. 종교 행사 열심히 참여하고 뭐 있으면 꼬박꼬박 자리 지키고 기도 열심히 하는 분들 보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좀 위험한 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 거야 나무랄 수 없는 일이지만, 개중에는 그 외의 일상에는 전혀 충실하지 않으면서 마치 어떤 보상을 구하는 마음으로 종교에 열중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평소에 인정받지 못하는 부분을 여기서 메워보려는 느낌이 들 정도로요.

제게는 그런 모습이 삶의 균형이 깨진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신앙 생활이 중요하듯이 일상에서 우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도 정말 중요한 거잖아요. 종교적인 가르침을 잘 녹여서 평소에 제대로 실천하는 것도 종교의 큰 목적 중에 하나일 텐데, 내 생활이야 어찌되든 그저 거기에 몰두하려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을 믿는 행위가 일상의 포기로 이어져서는 안 되는 거죠. 신도 그걸 바라지는 않으실 거라고 믿어요.

사무엘 씨도 혼자서는 도저히 균형을 잡기 힘든 순간이 있으실 텐데요.

그렇죠. 일과 연애, 의무와 권리, 이상과 현실. 균형이 필요한 순간들은 정말 많고 또 가끔은 그 사이에서의 균형이란 뭔지 감도 안 잡히는 때가 있어요. 그런 때는 다른 사람들과의 모임이 대안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가진 서로 다른 특성들이 상보적인 역할을 하여 거시적인 균형을 이루기도 하고, 또한 그게 개인의 내적인 균형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고 믿어요. 내 안에 편중되고 모난 부분들을 다른 사람과 맞춰가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다듬기도 하고 깎아가는 것도 일종의 방법인 셈이죠.

또 가끔은 우리가 스스로를 포장하기도 하잖아요. 그걸 보고 가면을 쓴다고도 하는데, 저는 그런 행위들이 균형 감각을 키우는데 도움을 준다고도 생각해요. 사람이 적절한 장소나 상황에서 그에 맞는 가면을 쓸 줄 아는 것도 사실 건강한 일이거든요. 자신의 양립적인 모습을 인정하고 그 정도를 능숙하게 조절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균형 잡힌,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요.

결국 한쪽에 치우치더라도 다시 그 반대로 갈 수도 있는 태도가 정말 균형적인 마음가짐이니까요. 사실 균형을 이뤄가는 과정은 단순히 한 극단에서 중간으로 옮겨지지 않아요.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왔다갔다하면서 그 진폭이 줄어들면서 중간지점을 찾아가는 것이죠.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기계적인 중립을 고집하기 보다는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능동적으로 위치를 조정할 수 있는 편이 더 건강한 셈이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한쪽에 쏠려있다고 하더라고 언제든 반대 의견에 귀 기울이고 존중하며 상황에 따라서 기꺼이 움직일 태세를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사실 쉽지는 않아요. 저도 잘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마치면서 한 가지 더 여쭐게요. 이것이 정말 마지막 말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떤 말을 남기고 싶으신가요?

마지막이라. 여자친구에게 사랑한다고 하고 하면 너무 재수없으려나? (웃음) 글쎄요. 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것뿐이에요. 제가 왜 그런 말을 남겼는지는 아마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각자 알게 되겠죠. 저는 그저 거기까지만 하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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